거의 모든 회사들이 혁신을 표방합니다. 겉으로만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만 사실 간절히 혁신을 원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 많은 회사들 중에 혁신을 일으키고 혁신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는 회사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회사가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일단 상식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죠. 회사의 규정과 부서간의 업무 분장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함으로써 업무 효율을 꾀하는 관료주의(bureaucracy)를 들 수 있습니다. 기존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최적화되어 설계된 관료주의가 일단 굳어지면 변화와 혁신을 방해하는 틀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회사가 기존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만(arrogance)에 빠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작업을 게을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경영층의 도전정신이 노쇠해 버렸거나 (tired executive blood)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이 결여되는 집단 근시안 (executive myopia)에 빠진 경우도 혁신이 어려워집니다. 경영층이 혁신 경로를 잘 설정하였음에도 제대로 된 계획을 가지고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poor planning) 나 투자 즉시 이익을 누리려는 조급증 (short-term investment horizons)도 경계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식적인 혁신 저해 요소들과 끊임 없이 싸워가며 혁신을 추구한 많은 기업들이 결국 의미 있는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동력이 소진되어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업계에서 사라집니다. 결국 앞서 살펴본 상식적인 이유들 이외에 뭔가 다른 이유들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토마스 새뮤얼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제시된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적이고 불연속적인 기술혁신의 측면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Joseph L. Bower 과 Clayton M. Christensen이 그들인데요, 이젠 경영학 고전이 된 그들의 작품을 얼마 전 우연히 읽었습니다. 사실 토마스 쿤의 통찰력을 빌려와 경영학을 절묘하게 덧칠한 것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클래이톤 교수을 스타로 만들었죠. 저도 팬 중에 하나입니다.
Source: http://www.claytonchristensen.com/
이들은 파괴적 기술(disruptive technology)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기존 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기술을 무력화시키면서 새로운 시장을 형성해 버리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기존 시장에도 기존 시장에서 잘 나가던 공급자들에게도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disruptive 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죠. 예를 들겠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땅을 파는 굴삭기(excavator)를 생각해 보시죠, 요즘은 반짝거리는 은색 봉이 있는 유압식(hydraulic) 굴삭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수 십 년 전인 1950~60년대만 해도 디젤 엔진을 돌려서 쇠줄을 끌어 당겨 땅을 파는 Power Shovel (사진)이 대세였죠. 유압식 굴삭기는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시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힘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압을 이용한 기계를 만드는 원리는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이미 세상에 알렸지만, 그 원리가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기계가 되는 데 수 백 년이 걸렸던 것입니다. Power Shovel 입장에서는 유압 굴삭기는 disruptive technology인 것입니다. Power Shovel을 만들던 수 많은 회사들이 망했고, 초대형 굴삭기 등을 제외하고는 Power Shovel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Source: Wikipedia
자,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시계를 1950년대의 어느 날로 맞추고 장소를 미국의 한 회사로 떠나 봅시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Power Shovel 시장 세계 1위인 어떤 업체의 임원들이라고 생각해 보시죠. 여러분들이 보는 세계와 굴삭기 시장은 어떠할까요? 굴삭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의 임원인 여러분은 걱정할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시장 점유율은 안정적이고 시장규모는 커지고 있죠. 전승국 미국의 좋았던 사회분위기만큼이나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유압 실린더가 막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수준입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고참 연구소장이 유압 굴삭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제품이 개발될 확률도 극히 낮았고, 제품이 개발 된다 하더라도 시장성이 아예 없었습니다. 먼 앞날을 바라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하지만, 누구도 책임질 만한 프로젝트를 추진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마케팅과 재무를 담당한 임원들은 시장성과 투자지표를 들먹이며 예산 배정이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여러분이 범한 실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별로 잘 못하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규정대로 해오던 대로 했을 뿐이죠. 따져 보겠습니다. 기존 기술이 있습니다. 기존 기술은 막강하죠. 새로운 기술도 여러분은 알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아직 미약합니다.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기존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즉, 기존기술 > 예상되는 신기술의 발전 수준 > 신기술의 현재 단계
이런 부등식이 머리 속에 그려지죠. 그러므로, “신기술은 열등한 기술이고 신경 쓸 필요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뭐 이런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부등식을 이렇게 바꿔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존기술 > 대형 굴삭기 시장의 요구 수준
그리고,
예상되는 신기술의 발전 수준 > 중소형 굴삭기 시장의 요구 수준 > 신기술의 현재 단계
시장을 대형 굴삭기, 중소형 굴삭기로 나누어 보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바로 드러납니다. 즉, 시장을 보는 혜안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판단 했겠죠. “유압기술의 현재 개발 단계로는 중소형의 굴삭기도 만들 수 없지만, 조금만 더 개발하면 소형 굴삭기부터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중형 굴삭기도 머지 않아 만들 수 있다. 유압식 굴삭기는 컴팩트 할 뿐 아니라, 운영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에 일단 시장에만 진입할 수 있다면 기존 굴삭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완전히 다른 결론입니다.
간단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원리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 추세를 잘 살피다가 앞으로 발전될 신 기술이 접근 가능한 기존 시장 또는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이 포착된다면 베팅을 해도 좋다는 것이죠. 단, 주의할 점! 신기술을 기존기술과 단순히 비교하면 여러분께서 내리신 것과 같은 그릇된 결론을 얻습니다.
추가로, 몇 가지 고려할 내용입니다.
일단, 기존 회사의 합리적 관행으로는 disruptive technology의 가능성을 정당하게 평가해서 예산을 배정하고 사업화할 방법이 없습니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장의 소비자들이 아직 그 제품과 그 기술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새 프로젝트의 순현재가치(NPV)는 당연히 마이너스가 될 것이고, 어떤 CFO도 NPV가 음(-)인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정기예금을 하겠죠! 따라서, disruptive technology의 파도에 올라 타려면 경영자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CFO와 COO가 반대해도 연구소장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 그런 사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한가지. 시장조사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 이미 밝혀 드렸죠. 시장은 아직 그 기술을 모르고 있고, 또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시장 조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CFO와 COO가 내린 결론과 똑 같습니다.
덧붙여, disruptive technology는 새로운 소규모 조직에서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영업이나 일반관리 등의 overhead를 기존 조직과 공유하면 비용이 줄 것도 같지만 관료화된 기존 조직 자체도 문제이고, 계속 적자가 나거나 정말 아주 적은 이익만 나는 사업부가 기존의 공룡조직에서 계속 살아 남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죠. 아마도 조직 개편이 있을 때마다 그 사업부를 없애는 안건이 항상 1순위가 될 것 같습니다. 또, 아주 작은 조직에서 아주 작은 주문(order)에도 모든 사람이 성취감에 기뻐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어쩌면 그런 종류의 기술을 오랜 기간 개발해야 하는 개발자와 리스키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하는 프로젝트 책임자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최적으로 환경일지도 모릅니다. 사족으로, 제품 컨셉, 초도 생산량, 마케팅 비용 등등 모두 아주 작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Disruptive Technology의 사례는 무궁무진 하고,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데스크탑과 노트북과 피처폰을 대체해나가는 스마트패드와 스마트폰이죠. 작은 교훈이지만, 항상 장기 생존 해법을 고민하는 경영자 여러분들께서 참고하실 내용 같아 적었습니다.
참고: Disruptive Technologies: Catching the Wave, by Joseph L. Bower and Clayton M. Christensen, Harvard Business Review, Jan.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