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잡스
얼마 전부터 뒤늦게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읽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오랜 기간 동안 삼고 초려 끝에 섭외한 작가답게, 자서전은 읽는 이들을 빠져들게 만듭니다. 정말 찌질한데다, 치사하고, 사기꾼
기질마저 있는 20대 후반의 잡스가 “회사 생활”을 하며 겪는 일화들을 읽으며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고 동정심에 짠한 느낌을 가지다가 이내 감탄하게 되죠.
찌질했던 젊은 잡스는 스펙을 갖춘 엔지니어가 아니었습니다. 고교시절에 1년간 전자공학 과외활동을 하긴 했지만, 이공학 학위는 없습니다. 형편에 비추어 어렵게 들어간 값비싼 대학은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 두었고,
이어 취직한 전자회사에 몇 달 다니다가 명상에 심취하여 도 닦으러 인도로 갑니다. 인도
생활을 마치고 키워준 부모조차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다시 귀국해 전에 다니던 전자회사에 다시 다니면서 집 근처에 위치한 스텐포드 대학교 강의를
몰래 듣습니다. 하지만, 그의 직종은 엔지니어였습니다. 뛰어나지 않았을 뿐이죠. 그리고 그에겐 돈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영업 기질과, 돈에 관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사기꾼 기질이 있었을 뿐, 경영학에 대해서 역시 아는 것이 없었죠.
그러던 그가, 8bit CPU가 달렸던 추억의 컴퓨터 Apple II 를 크게 성공시키며 “개인용 컴퓨터”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잡스는 여전히
찌질하지만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여 곡절 끝에, 그 동안 탁월한 엔지니어였던 공동창업자 워즈니악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기술 부분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체 프로젝트를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는 조직과 힘을 갖추게 된 것이죠. 그 결과, 잡스를 우뚝 선 영웅으로 만든 역작 메킨토시가 탄생하게
됩니다.
메킨토시는 원래 잡스의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엔지니어 Jef Raskin이 소수 인력으로 꾸려가던 미국 돈 천불 미만의 초저가 개인용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였죠. 당시 개인용 컴퓨터들의 가격을 감안하면 천불이라는 목표 판매가는 현재 우리가 체감하는 가격으로 환산한다면 이삼십
만원 정도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느려터진 싸구려
부품을 써야 했고, 힘센 CPU가 필요한 복잡한 그래픽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가격”이 최고의 목표였죠. 그렇게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나름 잘 꾸려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변두리 프로젝트에 “리사” 프로젝트로부터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유령처럼 다가와 거머리처럼 달라 붙습니다. 찌질하죠. 요 얘기는 조금 있다 하겠습니다.
헨리 포드 그리고 모델 T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Jef Raskin가 추구했던 “낮은 목표 판매가 정책”은 뿌리가 아주 깊고 매우 성공적이었던 마케팅
정책입니다.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가 혁신적인 모델 T
(Model T)를 마케팅 때 사용했던 정책이었죠. 모델
T는 1908년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1971년까지 6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였습니다. 포드는
이 모델 T를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 미국 돈 500불에 판매합니다. 포드도 라스킨도 수 백 만 대를 팔기 위해서는
꼭 반드시 낮은 가격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라스킨의 이러한 생각을 요약한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한
개인용컴퓨터 (computers-by-the-millions) 라는 표현이고 포드도 동일한 요지의 발언을
했었죠.
여하튼, 모델 T의 낮은
가격은 순수하게 “마케팅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즉, 수 백 만 대를 팔 수 있는 가격을 “완성차 시장” 에서 먼저 정해야 한다는 헨리 포드의 마케팅 판단에
따른 것이었죠. 다시 말하면, “모델 T를 조립할 때는 드는 추정 생산비에 적당히 간접비를 얹고 이윤을 계산해 넣는 방식으로 가격이 결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제조원가와 간접비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으로 봤고, 따라서
중요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We have never considered any costs as
fixed. Therefore we first reduce the price to the point where we believe more
sales will result. Then we go ahead and try to make the prices. We do not
bother about the costs. The new price forces the costs down.”
Henry Ford, My Life and Work (Doubleday,
1923)
흔히 사람들은 모델 T 생산에 처음 사용되었던 대량 생산 방식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가 그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하죠. 하지만 실상은 좀 다릅니다. 헨리 포드의 머리 속에는 다음과 같은
우선 순위가 명백히 존재 했습니다. 즉,
낮은 목표판매가격 (마케팅) à 저원가
설계 (엔지니어링) à 대량
생산 체제 (생산)
낮은 목표판매가격에 대한 마케팅적 결단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가
아는 모델 T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대량 생산 체제도
고안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자동차의 폭발적인 보급도 상당 기간 지연되었을 테죠.
따지고 보면 헨리 포드는 혁신적인 생산 방식의 창시자로서 보다는 뛰어난 마케터로서 더 위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동의 하시나요?
울보 잡스
다시 찌질한 스티브 잡스 얘기로 돌아 가겠습니다. 거머리처럼 라스킨의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달라 붙은 잡스는 헤게모니 다툼을 벌입니다. 싸구려 부품을 쓴 천 불짜리 컴퓨터로는
자신이 그토록 구현하고 싶어했던 비트맵(bitmap) 기술을 이용한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를 구현할 수 없었지 때문이죠. 이리 저리 잡음을 일으키다
사장 앞에서 라스킨과 끝장 토론을 하죠. 이 토론에서 밀리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업자이자 대주주인 잡스의 막강한 지위 앞에서 라스킨은 오래 버틸 수 없었습니다. 회사를
떠나야 했죠. 그리고, 라스킨 없는 매킨토시 팀을 잡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어 갑니다. 한 천재가 마음껏 뛰놀 자신만의 작은 공간을 찾은 것이죠.
천불 미만의 낮은 목표가격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쓰게 하겠다는 라스킨과 조금 더 비싸더라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GUI를 구현하겠다는 잡스. 누가 옳았을까요? 찌질한 천재 잡스 때문에 애플에서 쫓겨난 라스킨은 Cannon으로
자리를 옮겨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꿈꾸었던 기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 저것 고려하다
보니 천불을 넘긴 가격표가 붙었고 몇 대 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잡스는
화려하게 $2,495짜리 매킨토시를 출시하죠. 그의 전작 Apple II가 $1,200 정도였으니,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숫자로 본다면 가격이 두 배가 된 셈입니다. $1,500이었던 당시 IBM의
개인용 컴퓨터 가격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잡스의 목표가격은 $1,950정도였는데, "마케팅"을 강조하는 신임 CEO의 논리를 넘지 못했었던 것이죠. 가격 때문이었을까요? 여하튼, IBM PC의 돌풍을 잠재우지 못했지만, 매킨토시는 애플을 애플답게 해 주는 효자 상품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훌륭한 엔지니어였지만, 가격 이외에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라스킨은 지고, 훌륭한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가격은 물론 소비자가 "장차 열광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잡스는 이긴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훌륭한 엔지니어였지만, 가격 이외에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라스킨은 지고, 훌륭한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가격은 물론 소비자가 "장차 열광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잡스는 이긴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마케팅 마이오피아 (Marketing Myopia: 마케팅 근시안)
모델 T와 매킨토시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포드와 잡스는 결과적으로
뛰어난 마케터였습니다. 포드는 가격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고, 잡스는
가격도 중요하지만 GUI라는 혁신적인 제품 특성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완벽함으로 전에 없던 소비자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뛰어난 마케터일 수 있었던 원인을 찾자면 아마도 수 백 개쯤 될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의뢰하면 수 천 페이지에 달하는 리포트를 만들어 줄 수 있을 테죠. 하지만 그 중 하나만 들라면 그들의 초점이 제품이 아닌 소비자와 시장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았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조직했던 것이죠. 앞서 말씀 드렸지만, 그들의 머리에는 소비자와 시장,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마케팅 정책과 목표 그리고 마케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회사의 내부 외부 역량의 최적
조합이라는 우선순위가 명백했다는 것입니다. 마케팅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파는(sell) 것에 앞서 고객의 필요를 충족(meeting
customers’ needs) 에 먼저 신경을 쓴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문제에 대해 거꾸로 된 우선 순위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머리 속에는 제품을 효율적으로 잘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하죠. 그리고, 그런 분들은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인구가 증가하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면, 소비자의 평균 소득이 증가하면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좀더 잘하기만 하면 우리의 매출은 증가할 것이다.
-
우리가 팔고 있는 제품에 대한 수요는 영원할 것이다. 대체
상품이 출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
우리 회사는 이미 필요한 만큼 덩치를 키워 놓았고,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을 누리고 있다. 따라서, 계속 규모를 키워 평균 제조 원가를 계속 줄이기만 해도 이윤을 더 크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효율적인 대량 생산 체제는 매우 중요하다.
-
R&D를 잘 하는 것이 우리 회사를 확실히
성장시키는데 매우 중요하다.
소위 마케팅 마이오피아 (Marketing Myopia)에 빠져계신
이런 분들을 위해 얼마 전 고인이 되신 Theodore Levitt 하버드 경영대학 교수는 간단한 참고
사례를 제시합니다.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인 19세기 시점에서
말 채찍 (buggy whips) 산업을 생각해 보라고 말이죠. 제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21세기를
사시는 여러분의 시각에서 다음의 내용을 판단해 보시죠.
-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신흥 시장도 열리고 있으며, 소득도 크게 증가하고 있어 좋은 말 채찍을 계속 만들면 매출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
말 채찍 수요는 영원하다. 말 채찍 이외의
방법으로 말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우리 회사는 말 채찍 미국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의 낮은 원가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원가
우위를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효율적인 말 채찍 대량 생산체제를 갖출 목적으로 생산기술 연구와 시설투자에 매진하고 있다.
-
말 채찍이라고 다 같은 말 채찍이 아니다. 보급형
말 채찍에서부터 특수 용도 말 채찍까지 다양한 제품을 높은 품질로 생산할 수 있도록 말 채찍 소재부터 완제품 조립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R&D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Levitt 교수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말 채찍 시장을 정의할 때, 제품 관점에서 “말 채찍 시장”이라고 정의하는 대신에 소비자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대신에 “운송(transportation) 시장” 또는 좀 혁신적으로 “에너지 원(energy
source)에 대한 촉매(catalyst) 또는 촉진제(stimulant)
시장”이라고 정의 했더라면 말 채찍 생산은 결국 접어야 했겠지만, 자동차에 들어가는 팬 벨트나 에어 클리너 공급자로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소비자의 필요와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마케터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회사의 경영자는 반드시 훌륭한 마케터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며 수 많은 “마케팅
근시안”들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집행하는 일은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헨리 포드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퇴근 후 밤마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을 낄낄대고 읽으며 “이거 완전
쩔어!” (This is shit!) “예술합시다!” (Never
compromise!)를 외치는 찌질하지만 영원히 젊은 잡스를 만나보고 싶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Marketing Myopia,
Theodore Levitt, Harvard Business Review, Jul, 2004 을 주로 참고 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