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E, or not QE?
양적 완화(QE). 이 요상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죠. 그 정도로 양적 완화는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양적 완화가 시작되면, 채권 시장, 주식 시장 또 부동산
시장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특히 주식 시장은 양적 완화의 열렬한 팬입니다. 지난 주말의 요동도 또 앞으로 보시게 될 이번 주의 흐름도 모두 7월 31일부터 시작되는 미국 연준의 FOMC의 양적 완화 결정에 대한
전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빅 이벤트죠. 얼마 전 어느 경제지에
실린 양적 완화를 애타게 구하는 다소 긴 기사를 읽고 오랜 만에 글을 쓸 결심을 했습니다. 바쁜 일상
탓에 많이 늦었지만, 경제학자들과 양적완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속내를
좀 적어볼까 합니다.
필요 악:
인플레이션
물가 상승도 없고, 은행에 돈을 맡겨도 이자를 주지 않는다면 또 도둑맞을
염려가 없다면, 여러분은 십중팔구 돈을 차곡차곡 여러분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보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관한 돈의 가치는 은행이든 집이든 그대로 보존되는데다 날도 더운데 은행가기 귀찮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은행이 갑자기 1%의
정기예금 이자를 준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트리스 아래 돈을 쓸어다가 은행에 맞길
것입니다. 은행에 맞기는 순간, 사람들은 그 돈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거나 주식을 사거나 사업을 시작하려는 동생에게 돈을 꿔줄 수 있는 가능성을 잠시 포기해야 하지만 그 대가로 약간의 이자를
받습니다. 그 결과, 당장의 소비나 투자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소비나 투자결정은 “내가 가진 돈의 가치가 장차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영향을 받습니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 보죠. 아래와 같은 유명한 등식이 있습니다.
실질금리
= 명목금리 – 물가상승률
은행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금리는 명목금리(nominal interest
rate)입니다. 눈에 보이는 금리죠. 그런데, 앞으로 내가 맡긴 돈의 가치가 어찌 변할 것인가를 보려면, 물가상승률(inflation)도 감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인이
고려된 금리가 실질금리(real interest rate)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단순한 빼기입니다. 누구든 쉽게 계산할 수 있죠.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은행 정기 예금 금리는 1%인데 물가상승률은 3%인 경우죠.
앞선 식을 사용하면, 실질금리는 -2%로 계산됩니다.
실질금리
(-2%) = 명목금리 (1%) – 물가상승률 (3%)
다들 아시겠지만, 이 상황에선 많은 사람들이 은행 정기예금을 해약하고
돈을 굴릴 다른 방법을 찾게 됩니다. 가만 있으면 해마다 자기가 가진 돈의 가치가 점점 줄어드는 벌을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주식시장도 기웃거리고 아파트나 상가를
좀 사볼까 생각을 하게 되죠. 또, 옆집 철이네 아빠가 유망한
벤처사업이라고 극구 칭찬하는 회사에 투자 해볼까 하는 생각도 조금 더 절실히 하게 됩니다. 결국, 소비와 투자는 늘어나게 되고, 그 결과로 물가가 좀 더 오르고 그에
따라 좀 더 소비와 투자는 늘어나게 됩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이것을 경제 성장이라고 부르며 모두들
좋아합니다. 보너스도 두둑이 받고 근사한 휴가도 즐길 수 있게 되니까요. 이것이 경제학자들의 머리 속에 있는 천국 같은 상황입니다. 약간의
인플레이션과 실질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열쇠죠.
사족이지만, 인플레이션은 그 자체로는 죄악입니다. 현금을 가진 사람들 혹은 매달 일정한 금액의 월급이나 연금을 받는 저 같은 사람들이나 은퇴한 노인들 호주머니에서
아무런 동의 없이 돈을 빼앗아 주식과 집과 공장을 가진 자산가들이나 빚쟁이들에게 나누어 주니까요.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저에게는 죄악이지만, 자산가들과 빚쟁이들 입장에서 냉정하게
따져보면 축복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플레이션을 다소 과도하게 일으켜서라도 “자산 시장 안정”과 “부채
상환 능력 유지”라는 아름답게만 들리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리고, 그것이 경제 위기를 해쳐 나가는 고육책인양 포장합니다. 마치 자신은 이익을 보지 않지만 공익을 위한 선택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이죠. “매일경제신문” 같은 대한민국의 대표 경제지가 앞장서서 부동산 가격이 붕괴되면 나라 경제가 망가진다는 논리 아래 부동산 산업계와
연대하여 부동산 가격 유지 궐기대회를 열고 계속해서 집값을 올려야 한다는 사설을 써 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경제학자들은 다소간의 인플레이션은 필요한 것으로
봅니다. 제 입장에선 인플레이션은 악이니, 결국 인플레이션은
필요 악인 겁니다.
최후 수단: 양적 완화
수퍼박테리아란 놈은 모든 항생제를 이겨내는 힘을 지닌 미생물입니다.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아프기 시작하면 의사들은 보통 값싸게 널리 쓰이는 항생제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차도가 없으면 항생제 단계를 높여 싸우기 시작합니다. 값도 비싸고
또 부작용도 더 많은 방법이지만, 환자는 살리고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수퍼박테리아는 의사가 가진 최후의 수단을 비웃어버립니다. 가엾은
환자는 이 싸움의 희생자가 되죠. 이런 일이 경제에도 일어납니다.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정점을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경제 규모(GDP)가 계속 줄어드는 수모를 당하죠. 인구, 정치, 기술, 제도, 문화 등 일본이 수모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오늘은 간단히 숫자 몇 개만 보겠습니다. 앞서
보셨던 공식으로 돌아가죠. 일본은 제로금리로 유명하죠. 그러니
명목금리는 "0" 입니다. 물가는 1999년부터는 오히려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물가상승률은 -1%쯤으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실질금리는 1%가 됩니다.
실질금리
(1%) = 명목금리 (0%) – 물가상승률 (-1%)
소비와 투자가 줄고, 줄어든 소비와 투자 때문에 물가는 더 떨어지죠. 실질금리는 더 높아지고, 소비와 투자는 더욱 줄게 됩니다. 이른바 경제가 디플레이션 함정(deflation trap)에 빠진
겁니다. 만약 금리가 5%쯤 되었더라면, 하루아침에 금리를 3%로 낮춰서 이 함정을 쉽게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부동산 시장을 유지하려고 이전에 오랫동안 금리를 자꾸 낮추다 보니 명목금리는 이미 0이 되었죠. 금리를 움직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었죠.
일본의 경제 관료들은 영리했습니다. 2001년 3월 중순 그들은 양적완화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내고 돈을 찍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찍어낸 돈이 경제에 공급되면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심해지면 그토록 바라던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현실이 되어 사람들이 돈도 쓰고 투자도 시작 해서 디플레이션 함정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 경제 관료들보다 조금 더 영리했습니다. 돈을 감추기 시작했죠.
돈은 사라지고: 화폐유통속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고 경제적 선택을 합니다. 아파트
값이 오를 것이 분명하니 (자산 인플레이션 기대) 다소 과도한
빚을 져서라도 아파트를 산다(경제적 선택)는 식이죠. 닥쳐올 인플레이션이라는 “악” 앞에서
패자의 위치를 버리고 “완벽한 승자의 위치” 즉 “빚쟁이 겸 자산가”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달콤한 전리품을 챙깁니다. 십수억짜리 아파트의 주인이 되어
올라가는 아파트 값을 보며 흐뭇해 하고 주변의 부러움을 즐깁니다. 승자가 되는 거죠.
세상이 바뀌어서 자산 인플레이션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죠. 예를
들어 아파트값은 어느 유명한 역술인의 얘기처럼 2032년까지는 절대 오르지 않는다고 모두들 믿는 다고
가정해 봅시다. 게다가, 우리나라 외부의 경제문제 때문에
경제 전망이 극히 좋지 않다고 생각해 보죠. 사람들은 이제 정 반대의 선택을 할 것입니다. 아파트를 팔아 현금을 최대한 많이 확보한 채 새로운 사업의 시작을 미루고 데이트 비용을 줄이기 시작합니다. 돈이 돌지 않게 되는 것이죠. 돈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사람들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위해 주인 곁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상황을 아래의 식으로 표현해 보죠.
경제에 존재하는 물건 x 물건의 가격 = 돈의 양 x 돈이
도는 속도
양적완화는 돈의 양(money stock)을 올려서 물건 값을 올리려는(inflation) 정책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경제에
존재하는 물건의 수량(goods supply)과 돈이 도는 속도 즉 화폐유통속도(velocity of money)는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입니다. 그럴까요? 양적완화가 도입된 일본의 경우 돈이 도는 속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락했죠. (아래 그림에서 파란색 선이 유통 속도와 유통 속도 증가율을 각각 나타냅니다.) 양적 완화로 돈의 양이 늘었지만, 불안한 사람들이 돈을 계속 움켜
잡았습니다. 마이너스 실질 금리는 찾아 오지 않았고, 경제가
계속 어려워지면서 제대로 된 직장에서 제대로 된 월급을 받는 젊은이들을 제외한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겐 결혼도 사랑도 사치가 되었습니다. 혼수도 새 차도 고려대상 밖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으니 과외
선생도 어렵기는 매한가지 입니다. 집에 대한 실수요도 점점 약해지죠.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지금 똑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화폐유통속도는
떨어지고 있고, 일자리의 질도, 출산율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계 부채가 너무 많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줘서 자산시장을 떠받치는
일도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직은 제로금리가 아니고, 재정정책도 아주 조금은 더 할 수 있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좀더 세게 또 길게: 양적 완화
양적완화를 촉구하는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실패 원인을 일본이 양적완화를 좀더 세게 좀더 길게 하지
못했던 것에서 찾았습니다. 실질금리를 완전히 마이너스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 효과가 미처 확인되기도 전인 2006년에 서둘러 양적완화를 끝냈다는
것이죠.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영국과 EU와 미국은 2%로 되어 있는 목표 인플레이션을 높여서라도 확실이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되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양적완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문을 넣습니다. 즉, 불안한 사람들이 돈을
움켜쥐는 탓에 화폐유통속도가 줄어들어 생기는 효과를 완전히 상쇄할 만큼 많은 돈을 지속적으로 풀어 모든 사람들이 두 손 다 들고 물가가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기대를 (inflation expectation) 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이 주장을 달리 말하면, “자산가이자 빚쟁이인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손해 볼 수 없다”는 선언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말이죠.
맺으며
선진국 경제는 우리와는 달리 이제 대부분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죠. 이제 남은 카드는 돈을 찍어 대는 양적완화 정도입니다. 앞서 보신
바와 같이 자산가들과 빚쟁이들은 양적완화를 확실하게 세게 하라고 주문합니다. 그리고,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도 알고보면 엄청난 빚을(공공부채) 지고 있는 가장 큰 빚쟁이 들이죠. 섬뜩 하신가요? 양적완화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이와 같이 첨예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죠.
미국서 세 번 째 양적 완화 정책이 이번 주 중반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주식시장은
아마도 열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양적 완화 정책이 효과가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미 양적완화의 효과는 점점 줄어 들고 있죠. (아래 그래프를 참고하십시오.) 어쩌면 양적 완화 보다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여주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빠른 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더운 여름에도 사람들은 일자리와 복지에 대해서 또 재벌에
대해서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것이죠. 일본인들이 서양 문물을 먼저 받아들이면서 그들 멋대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 경제는 경세제민 즉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을 경영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경제”를
살릴지 “South Korean Economy” 를 살릴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아래 두 자료를 주로 참고했습니다.
“QE, or not QE?”, The Economist, July 14,
2012
“Accounting for the Decline in the Velocity
of Money in the Japanese Economy”, Institute for Monetary and Economic Studies,
Bank of Japan, Jul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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