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 반사회적 처벌 그리고 빅 데이터 민주주의
아! 일관성
우리는 모두 일관성(consistency)을 기대합니다. 어제까지 나와 사랑을 속삭이다 오늘 다른 이성의 품에 평온하고 행복하게 안겨있는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죠. 사랑과 희생을 강조하며 평생을 봉사활동에 헌신해 왔다는 누군가가 실은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대해 왔다는 소식도 우리를 슬프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은 어떤가요? 선거 전에는 구체적으로 뭔가를 해줄 것으로 약속했다가, 선거 결과를
알리는 신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나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정치인들도 있죠. 또, 한 입으로 대구에서는 이 말을 또 광주에서는 저 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더 흔한 경우는,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경우죠. 가계
부채를 더 이상 늘지 않도록 억제하는 그 규제만큼은 유지하겠다고 하고는 “숫자의 변화 없이” 사실상 규제를 풀어 버리는 경우가 가장 최근에 제가 본 사례입니다. 불과
몇 일 만에 적극 반대에서 적극 찬성으로 바뀐 반값등록금 공약 사례도 있군요.
우리나라만 이럴까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러닝메이트를 잘 뽑아 큰 덕을 보고 있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롬니 같은 경우에도 그가 믿는 정치적
신념이 있는지 조차 의심될 정도로 말을 많이 바꿔왔습니다. 진보성향의 메사추세츠 주에서 활동할 때는
낙태의 권리, 총기 규제와 기후 변화 방지 정책을 지지했었죠. 심지어
정적 오바마의 의료보험개혁의 핵심인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정책도 그 당시에는 찬성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사안에 대해 완전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미국 보수층의 지지를 받아서 미국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처지라 그가 말을 바꾼 거라고 미국 유권자들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어야 할까요?
비록 정치학의 문외한이지만, 우리 삶에서 일관성(consistency)의 반대 개념은 기회주의(opportunism)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관된 말과 행동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손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유권자의 표를 잃을 수도 있고, 상사에게 깨질 수도 있으며, 사업기회를 잃을 수도 있죠. 기회주의는 그 표와, 상사의 칭찬과, 사업 기회를 당장 잡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다만, 일관성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자기는 절대 일관성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속이며 살죠. (저만
그런가요? 하하하…) 하지만, 일관성을 유지하고 살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신뢰(trust) 때문입니다. 그래서 덕유필린(德有必隣) 이란 말이 있죠. 덕은 도덕적 일관성 없는 기회주의자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은 분명합니다.
반사회적 처벌
하지만, 뭔가 찜찜합니다. 눈치
하나로 험한 세상을 수 십 년을 살아온 우리에겐 볼 일 보고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그런 느낌입니다. 도대체
일관성에 대한 보상이 있기나 한가? 험한 꼴 밖에 더 당하는가? 그렇죠. 어떤 온화한 성품의 강직한 공무원이 있다고 “가정” 하죠. 그 분은 법과 공익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과 협력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하나 때문에 그토록 받고 싶은 돈을 받지 못하는 그 분의 상사와 옆 동료들이
있을 수 있죠. 상사와 동료들은 이 분을 제거하려고 모든 힘을 조용히 쓰죠. 항상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기도 하고, 인사 철이 되면, 산속이나 바닷가 쪽으로 보내버릴 방법을 찾습니다. 이런 행동을 사회심리학에서는
반사회적 처벌(anti-social punishment)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협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협동을 이끌며 열심히 뛰는 사람(cooperators)
뒤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결과를 챙기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무임승차자(freeloaders 또는 free-riders)들이 적반하장 격으로 협동자들을 공격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경쟁자를 없애려는 목적에서 이 모든 것이 비롯됩니다.
반사회적 처벌 현상은 서구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네 개 나라에서 유독 엄청나게 관찰됩니다. 어느 나라인지 볼까요?
South
Korea
Greece
Russia
Saudi
Arabia
이런! 혹시, 이런 나라에
살고 계신가요? 만약 이런 나라에 사신다면, 당장 여러분이
속한 조직의 장에게 가서, “협동의 룰”을 정립하라고 조언하십시오. 협동의 룰을 통해 협동자들을 충분히 또 잘 보호하지 않으면 언제나 항상 무임승차자들이 득세하게 되니까요. 만약, 우리 주위에서 무임승차자들이 득세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일관성에 대한 보상은 물론 협력자에 대한 보호도 없는 겁니다.
연구 결과가 그렇답니다. 또 우리 경험도 그렇죠?
신뢰의 민주주의
정치 이론은 투명성(transparency)이 확보되면 신뢰가 증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방이 환이 들여다 보이는 주방에서 조리된 음식은 좀 더 신뢰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즉,
다음의 인과관계가 성립할까요?
투명성 à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 à 민주적 제도(democratic institution)에 대한 신뢰
투명성은 계속 강조되어 왔고 모든 법령과 정부 정책들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투명성이
증가된 셈이죠. 그런데, 정치인들을 신뢰하시나요? 투표율은 높아지고 있나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나요? 정부 정책에 대한 공청회의 절차적 민주성을 신뢰하십니까? 지지하는
정당이 있으신가요? 정부가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슬프게도,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되면 경제적 불평등이 감소한다는 등식도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성립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가 되어 버렸죠.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1987년
체제, 신자유주의 그리고 IMF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머리를 길게 기를 수도 짧은 치마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때가 있었죠. 그런 체제는 우여 곡절 끝에 1987년 일단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이후 정권이 바뀌고 우리는 그들을 신뢰했습니다. “이번엔 다르겠지”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우리
삶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때마침 1980년대
초부터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를 앞세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광풍이 우리를 비껴 갈리
만무했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 휩싸여 서서히 변해가던
우리의 삶은 아시아경제위기와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건을 통해 신자유주의체제에 백기 투항했죠.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급격히 또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직장인으로
경험하던 직장생활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40대 중반 이후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하실 테죠.
이 격변의 시기에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입니다. 세상은 이제 두
시기로 나뉘게 됩니다. 사회주의 실험장이었던 소련이 존재하는 세상과 소련이 사라진 세상. 소련이 건재했던 세상에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이 속한 나라가
소련처럼 되는 것에 대해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투표로
또 혁명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대중들과 타협했죠. 소위 사회적 계약(social contract)을 맺습니다. 많은 노동 규제와 복지정책들이
그 핵심이고, 서구의 복지국가도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부와 권력을 쥔 사람들이 최소한 “타협”을 통해 대중을 달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들은 대중을 두려워했습니다.
1989년 이후, 이젠
소련이 없죠.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엘리트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유권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죠. “정권은 바뀌는데 정책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확이 이 상황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엘리트들은 엄청나게 발달된 뇌 과학을 통해 유권자들의 감정을 조작(manipulate)하기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언론의 기능이 매우 중요해지죠. 어떤
메시지가 어떤 순서로 언제 어떤 강도로 전달되면 어떻게 유권자들의 감정이 바뀔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섭죠.
불신의 민주주의, 빅데이터 민주주의 그리고 일관성에 대한 보상
이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최근
일부 정치학자들 사이에선 “신뢰” 대신 “불신(mistrust)”을 민주주의의 매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정치인들을 믿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권력을 넘겨주는 방식 대신에 유권자들이 그들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스스로 빅 브라더가 되어 정치인들과 관료를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죠. 어떤 정책에 대한 각료회의의
토의 내용이 발언자의 실명과 정확한 발언 내용이 모두 적힌 형태로 24시간 이내에 인터넷에 공개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동영상과 함께라면 더 좋겠죠. 누가 어떤
경로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기여했는지 일반 대중들은 다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언 내용은 영원히 기록에 남게 되죠. 아마,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극도로 발언을 조심할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발언을 하면 또 평소 발언과 다른 주장을 하면 그 것으로 정치생명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테니까 말이죠.
방금 말씀 드린 이런 자료는, 이 차원은 지금도 공개되고 있는 “토의: 이견 없음, 의결: 원안 의결”로 가득한 “국무회록” 수준이 아닙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이 알게 해 주는 자료입니다. 공개하기 많이 꺼려지겠죠. 직접 감시 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테니
스트레스가 많을 껍니다. 또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한 정치인이
또 한 고위 관료의 모든 발언과 행적을 따라가보는 건 어떨까요? 신문 인터뷰, 강의 동영상, 회의 녹취록 등등의 자료를 모두 포함해서 말이죠. 아마도 그가 기회주의자인가 일관성을 지닌 인물인가 판단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세상은 빅 브라더의 세상입니다. 미국에선 술이나 담배 같은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사는 사람들에게 구매 시 “현금”만을 사용할
것을 전문가들이 권고합니다. 카드를 쓰면 건강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각종 보험료가
올라가기 때문이죠. 심지어 대출이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빅 데이터의 바다를 누비며 원하는 정보를 추출하고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기 원하는 은행과 보험사들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은 인공지능을 고용합니다. 퀴즈프로그램에서 퀴즈 챔피언들을 가볍게 눌러버린 IBM의 인공 지능 컴퓨터 Watson은 이미 많은 기업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Watson의 특기 중 하나가 “보험 사기범 잡기” 입니다. 보험 사기범이야말로 “일관성”과는 담을 쌓은 자들이지요. 동의 하십니까?
혹시, Watson이 일상에 바쁘고 지친 우리 같은 유권자들을 대신해서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감시해 줄 수 없을까? 그들이 근무시간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알려줄 수는 없을까? 그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또는 돈을 맡기거나 권력을 잠시 넘겨줘도 좋은지
판단해 줄 수 없을까? 혹은 “일관성 지표” 같이 점수를 매겨 줄 수는 없을까? 누군가 이런 정보를 저에게 넘겨준다면, 저는 말과-행동의 일관성, 어제
말과 오늘 말의 일관성 그리고 나에게 한 말과 내 이웃에게 한 말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나의 한 표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복인 척 하면서 국민의 이익 대신에 떡값을 건네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일하는 사람들 말고 말이죠.
IT
Korea
대한민국은 IT 강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을 빅 브라더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죠. 그리고,
구조화되지 않은 빅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솔루션을 미국에서 수입하는데 전혀 제약이 없는 미국의 우방국이기도 합니다. 결국, 기술적인 제약은 없습니다.
의지 문제죠. 그들을 누가 빅 브라더의 감시아래로 집어 넣을 것인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대선공약집
대선공약집은 공짜로 줘도 잘 안보게 되기 쉽습니다. 그만큼 정치와
민주적 제도에 대한 불신이 깊죠. 그런데, 안철수 교수는
그런 대선공약집 수십 만 부를 돈 받고 팔았죠. 아마도, 그런
일을 저지른 최초의 한국인이겠죠. 아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선공약집 “안철수의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 리더십의 바탕은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진심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따라옵니다. … 결국 진심은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안철수 교수의 이 발언 속에서,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그들의
기회주의적 행동 때문에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그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도전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아온 그의 삶 속에서
일관성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느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100여일 남짓 남은 기간 동안 계속 지켜 보겠습니다. 사족이지만, “안철수 룸싸롱” 사건도, 결국은 안철수 교수의 “일관성” 이미지에
대한 공격이죠. 아, 정말 사족이었네요.
맺으며
저는 대한민국 정치에서의 일관성에 대한 보상은 일관성을 유지한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도록 하고 기회주의적 행동을
일삼은 분들은 다른 곳에서 사회를 위해 공헌하도록 걸러 드리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또 다시,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은 바뀌지 않는다” 또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푸념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면, 우리 나라를 일관성에 대한 보상을 하는 나라 또 협력자에 대한 보호와 보상이 있는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합니다. 돈도, 기술도 있습니다.이젠 선택입니다.
진부하지만, 꼭 해야 하는 말: 선택은 우리
몫이죠. 그리고, 그 선택이 옳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주로 다음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김영사, 2012
Can democracy exist without trust?, Ivan
Krastev, TED 2012, http://on.ted.com/l6d9
Experimental psychology: The roar of the
crowd, The Economist, http://econ.st/JyjXsM
Big data: Crunching the numbers, The
Economist, http://econ.st/JwA9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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