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버냉키 인터체인지
대서양 연안을 따라 미국 동부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대표적인 고속도로가 Interstate
95 입니다. 야자수와 악어가 사는 최남단 플로리다에서 겨울에 춥긴 하지만 세금이 정말
적어 은퇴자들이 랍스터 먹으며 여생을 보내기 좋다는 최북단 메인 주까지 연결되는 긴 도로입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하버드 대학이 있는 보스턴과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을 차례로 만날 수 있습니다. 뉴욕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가 나오죠. 내친
김에 조금 더 달리면 밴 버냉키의 고향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나타납니다. 주 경계에서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190번 Exit이 나옵니다. 2009년 이 고속도로 출구는 “밴 버냉키 인터체인지”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지명에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미국서는 그리 낯선 일은 아닙니다만, 상당한 업적과 인기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밴 버냉키는 2008년 불거진 금융위기의 불길을 정말 단기간에 슬기롭게
잡았다는 공을 인정 받았던 것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유태인 부모 슬하에 태어난 밴 버냉키는 북쪽으로 가 보스턴에서 경제학을 공부합니다. 경제학자가 된 그는 거시, 미시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로 또 경제학
분야의 최고 권위 저널의 편집자로 입지를 굳히다 지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서 또 공화당원으로서 워싱턴
DC에서 활동합니다. 월스트리트는 항상 그의 입을 주목합니다. 그가 사용한 어휘, 말투는 물론 그의 표정과 눈빛까지도 분석하죠.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모두 거의 즉시 문서로 바뀌어 세상 누구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금융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부럽죠.
대공황 전문가 버냉키
경제학자로서 그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깊게 연구했습니다. 그는 대공황의 원인을 돈이 경제에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죠.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은행이 대출을 꺼리게 됩니다. 대출이 원활하지
못하니 사업가들이 필요한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어 일자리도 줄어 들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습니다. 그
결과 경기가 더 나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이 악순환이 심해지지 않게 하려면 하늘에 높이 뜬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helicopter drop) 방식으로라도 돈을 충분히 공급해서 물건 값이 점점 낮아지는
디플레이션(deflation)에 나라 경제가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어차피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는 화폐(fiat currency)이니
필요할 때 충분히 돈을 찍어서 경제문제를 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 정책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미국 경제에 공급했습니다. 그 결과였을까요. 집값도 폭락을 멈추고 이제는 반등을 준비하는 듯
보였습니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줄었고, 고용도 잘 되는 듯
보였습니다. 올해 여름의 미국 경제 모습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름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은 공공 부채(public debt) 총액 한도를 다루면서 현재 정치 시스템으로는 앞으로 어려운
경제문제가 제대로 풀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깊은 절망감을 안겨줬습니다. 버냉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순조롭게 증가하는 듯 보였던 일자리도 늘지 않게 되면서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커지게 되었죠. 여기에 대서양 건너 EU의 재정위기도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키는데
한 몫 했습니다. 기업도 소비자도 돈을 쓰지 않으니 이자율이 아무리 낮아도, 돈이 아무리 시중에 풀려도 경제는 계속 어렵게 되어 가는 형국입니다.
양적완화의 의미
양적완화정책은 우리 귀에 정말 생소한 이름의 정책이었죠. 여기서 “양”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돈의 양을 의미합니다. 돈을 많이 풀어서, 기업가와 소비자가 은행 창구에서 느끼는 대출의
어려움을 “완화”해 주겠다는 의미 정도로 새기면 좋겠습니다. 혹은, 움켜 잡은 돈줄을 좀 느슨하게 푼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죠. 어쨌든 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 이름을 가진 정책의 다른 이름은 돈을 공장에서 찍어(printing money) 시중에 푼다는 의미의 “발권력(seinorage) 동원”입니다. 통상적(conventional)으로 사용되는 재정, 금융통화 경제정책이 다
통하지 않을 때 쓰는 변칙 통화 정책(unconventional monetary policy)이자 사실상
마지막 수단(last resort)입니다. 이정도 말씀 드리면
눈치를 채셨겠지만, 양적완화 정책이 사용되었을 때 우리가 깨달아야만 했던 내용은 1) 경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미 이르렀으며, 2) 이전에 사용해봤던
재정, 통화 정책이 이미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 되었고, 3) 양적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안정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된다는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이제
양적완화 정책은 끝났고,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사물이 점점 뚜렷이 보이는 것처럼, 경제 현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께서 보시는 현실은 어떤가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양적완화 정책을 무한정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인플레이션 때문이죠. 양적완화 정책을 지속하면 결국은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초인플레를 겪은 짐바브웨에서는 “100조
짐바브웨 돈”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 화폐까지 발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외국 돈을 쓰기에 이르죠. 이런 일이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미국에서 벌어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버냉키
자신도 그리 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죠.
그래서 제3차 양적완화 대신, 그는 2013년 중반까지는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겠다고도 했고, 이번 에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라는 정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시중에 돈을 직접 공급하지는 않지만, 6년에서 30년 사이의 만기를 가지는 장기 국채를 사들이고 단기 국채를 팔아서 장기금리를 낮추겠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국채도 결국 사고 파는 것이고,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값이 정해집니다. 누군가 많은 양을 팔면 값이 떨어지죠.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인 국채의 값과 국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수익율(금리)은 반비례관계에 있습니다. 국채 값이 오르면 수익율은 떨어지고, 국채 값이 내리면 수익율은
올라갑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죠. 현지 미국 단기 국채에 적용되는 금리(수익률)은 이미 0이거나 0에 매우 가깝습니다. 바로 안전자산추구(flight to
quality) 성향 때문입니다. 사방이 불안하니 큰 돈을 둘 곳이 미국 국채 외에 없다는
판단을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만기 한 달짜리 미국 재무성 채권(treasury bill)은 수익률 0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100불을 미국 정부에다 꿔 주고, 한달 뒤에 단 1센트도 더하지 않은 100불을 받겠다고 거래 하는 것이죠. 정말 이상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니, 단기 국채를 대량으로 판다고 해서 단기 국채의
금리(수익률)가 오르는 영향은 매우 미미 할 것이고, 판 돈으로 장기 국채를 사들이면 장기 국채 값이 크게 오르고, 수익율(금리)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장기 국채의 수익율이 떨어지면, 미국 소비자들이 집을 살 때 내야
하는 모기지나, 자동차 할부금을 줄일 수 있어 소비를 부추길 수도 있고, 집값을 올릴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죠. 실제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국의 장기 금리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장기 경제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실제로 모기지 금리가 내렸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비싼 이자로 계약한 모기지를 싼 이자로 바꾸어 계약하는 일(mortgage refinancing)에 한꺼번에 나서는 바람에 은행 창구가 마비되기도 하고, 임시 전용 창구를 만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퍼레이션 트위스트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모기지 금리가
내리는 것이 경제에 끼치는 좋은 효과를 좋은 일자리가 안 만들어지는 암울한 현실이 압도한 것이죠. 모지기를
줄여서 약간의 목돈도 만지고, 매 달 지출을 다소 줄일 수 있다 해도,
가장이 안정된 직업(decent job)을 잃으면 집을 은행에 빼앗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미국의 현실입니다.
길은 어디에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미국의 연방정부 부채는 당시 미국
GDP의 20%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미국 정부가 빚을 더 지고, 그 돈으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재정정책은 이미 불가능해졌습니다. 금리를
내려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통화 정책도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미국의 기준 금리는 이미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양적완화를
해 보았지만, 2008년 위기를 완전히 극복하고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 변칙적인 편법들이 동원되지만, 효과가 클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초초한 사람들은 버냉키에게 돈을 더 찍어내라고 요구합니다. 에너지와
음식가격을 제외한 핵심인플레이션(core inflation)이 2% 정도에
불과해서 아직은 인플레이션 걱정할 때가 아니니 제3차 양적완화를 제발 해달라고 애원하죠. 하지만 그들은 핵심인플레이션율이 올 초에는 1.6% 정도였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 실물을 소유한 자산가들과 정부를 포함한 빚쟁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동의 절차 없이 돈을 빼앗아 가는 부작용이 있다는 경제 법칙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양적완화 덕에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올랐던 달콤한 추억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버냉키도 버냉키에게 돈을 더 찍어내라고 주문하는 그들도 다 틀렸을지 모릅니다.
2011년 Harvard
Business Review의 편집 방향은 자본주의 고치기 (fixing the system)입니다. 그들의 우려대로, 만약 기업의 운영 관행이나 정부의 규제 방식 등을
고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수정된 후에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문제 해결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점은 이전 글에서 이미
말씀 드렸듯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는 그 오랜
기간 동안 경제 이론에 근거한 또 다른 양적완화와 변칙 경제 정책들이 난무할지도 모릅니다.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 디폴트가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뉴스가 또 나왔군요. 눈 부시게 날씨 좋은 가을 날, 피곤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다음 기사를 읽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The Federal Reserve Take that, Congress In
the face of intensifying political assault, the Fed eases again, Sep 24th 2011,
The Economist